10. 새 성전이 나타남(요2:18-25)
“18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깊은 영적 무지 속에 갇혀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맡았고 율법의 말씀을 맡았으나, 실상 그 말씀의 참뜻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이용하여 육신의 길을 가고 있었으며, 결국 성전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은 그가 어떤 자격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증명하라며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표적을 보이라고 했을 때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같은 맥락의 표적으로 부활의 표적으로 눈에 보이는 표적이 아닌 ‘영적 표적’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육적 표적을 구합니다. 육적 표적이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이한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신(神)이란 이런 표적을 행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이런 육적 표적은 마귀와 같은 피조물들이 행하는 미혹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표적을 보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 표적은 생명의 씨가 없는 표적이며,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의 영혼에 아무런 구원을 주지 못하는 표적입니다. 반면 영적 표적은 사람에게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요나의 표적과 같은 부활의 표적은 영적 표적으로서, 그것을 보고 믿는 자들의 육을 거룩한 영으로 변화시킵니다. 즉, 영을 탄생시키는 생명의 씨가 있는 표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제자들은 모두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영적 표적은 사망을 삼키고 사람을 살리는 표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영적 표적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는 부활의 시대를 여시겠다는 선포였습니다.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 부활이 그들에게 전파되어 그들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사망의 권세를 가진 마귀가 진멸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부활의 영적 표적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그들을 지배하는 마귀를 진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까요? 바울처럼 만날까요? 베드로처럼 만날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참성전에서의 십자가 제사는 마귀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진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성전은 사망을 진멸하는 하늘 성전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함께 마귀는 진멸되었습니다. 마귀는 그곳에서 진멸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은 그분이 지니신 속성, 곧 ‘살려주는 영’의 속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었던 영적 표적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귀가 진멸된다는 것은 마귀가 죽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각 사람 속에서 마귀가 진멸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참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그들 내면의 마귀 권세를 진멸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그분은 원죄를 가진 옛 영을 죽이고 살려주는 새 영을 탄생시키시어, 그 안에서 참성전의 삶을 친히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일 만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겠다" 하신 말씀의 본뜻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는 곳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이름으로 나타내십니다. 성전에 이름을 둔다는 것은 그 성전을 통해 이름의 속성을 성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성전이 하나님의 이름, 즉 그 속성을 나타내는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신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시겠습니까? 바로 성전이라는 곧에 그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그런 물리적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면 어떻게 그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과 함께 성전의 개념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건물에서 ‘그리스도의 육체’로 전환되는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1, 23).” 이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는 유일한 예배 처소가 될 수 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삶입니다. 그리하면 때가 이르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영이 새롭게 탄생하고, 그 영이 생명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게 됩니다. 주님은 이것이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이 공생애의 출발은 참성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분이 하나님이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매개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참성전 안에 있는 이름이 중요한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마귀가 진멸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성전, 그리고 그 성전에서 드려진 참 제사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모두 자기 안의 마귀 권세가 무너지고 살려주는 영이 탄생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 또한 마귀를 진멸하는 참성전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참성전 된 성도들의 영에 들어가셔서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그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공생애 기간에는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를 통해 그 이름을 나타내셨다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제자들의 육체를 통해 그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이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도(道)가 마침내 세상에 실현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시면서 이 새로운 성전 개념을 계시하십니다. 이 물리적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며, 참성전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고수하던 성전 개념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설령 그들이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참성전을 파괴할지라도(십자가에 못 박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다시 일어서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영속에 임하시어 그들과 함께 참성전이 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즉, 성도들의 삶을 마귀를 진멸하는 거룩한 본부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이후 제자들 각자가 성전이 되는 영광스러운 시대가 펼쳐집니다. 그 제자들의 성전에서 생명의 진리가 솟아납니다. 그 제자들의 성전 안에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이름에 합당한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것은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속에서 이 구원의 과업을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참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구원의 일을 성취해 가실 때, 때로 제자들의 혼과 육체가 이를 방해하곤 합니다. 제자들의 혼과 육체는 여전히 땅의 영역에 속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욕으로 인해 예수 이름의 사역을 거스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고난이나 ‘사탄의 가시’를 통해 제자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육체의 약함을 통하여 그들의 혼과 육체마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약함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제자들의 혼과 육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 약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라 일컬어집니다.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은, 이후 그리스도께 연합한 모든 사람 역시 부활의 열매가 될 것임을 보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부활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망을 멸하시고 죽임 당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신령한 육체야말로 진정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며 보이시다가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로 그 성전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성전은 제자들의 영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성전이 되고, 그 성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십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제자를 통해 주의 이름을 나타내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 각 사람의 내면에 좌정하셔서, 백성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의 움직이는 성전이셨습니다. 그분이 계신 곳이 곧 진정한 예배의 처소였습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친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두신 그 거룩한 이름이 공생애 기간에 세상을 향해 선포되었습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때로는 병을 고치시는 권능으로, 때로는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역사를 통해 그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여러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권능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의 나타나심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통해 성취되는 그 이름의 사역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참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나타내시는 분이셨으며, 공생애 전반에 걸쳐 그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사람의 속마음을 친히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에 속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이십니다. 영과 혼과 육의 본연의 질서 속에서, 영은 결코 육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육체가 영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창조의 질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이셨으므로, 육에 불과한 인간을 따르거나 의탁하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증언 역시 주님께는 본질적인 필요가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그 내면이 육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들의 증언 또한 진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지역 교회는 거룩함이 흘러넘치는 참성전들의 영적 모임입니다. 이 지역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완벽하게 지켜집니다. 그러나 지역 교회에는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거룩한 임재가 솟아나는 성전 안마당까지는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향해 "이방인의 뜰은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짓밟으리라 (계11:1, 2)"고 경고합니다. 세상에 짓밟힌다는 것은 결국 세상 가치관에 농락당하고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성전 바깥뜰에만 머무는 신앙은 늘 영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성인 지역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이제는 성전 안마당, 곧 지성소의 은혜와 영광이 미치는 영역까지 깊숙이 들어와야 합니다. 이는 오직 영의 음성을 분별하고 들을 수 있는 신앙의 깊은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 은혜의 중심부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서 보전되고, 세상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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