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5-2. 내면의 개혁과 이름의 권세(딛3:1-7)

관리자님 | 2019.03.25 21:19 | 조회 293

5. 내면의 개혁과 이름의 권세(3:1-7)

 

1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 성도들은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며, 아무도 비방, 다투지 말고,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합니다.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온유함은 영적 성품으로 질서에 저항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 즉 성령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본문에서는 범사에 이 온유함을 나타낼 것을 기억시키라고 합니다. 기억시키라는 것은 체질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체질화 되는 가르침은 성령님의 가르침이 흘러내려 육체가 순종함으로 외부에까지 표출되는데 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이 계속될 때 그 훈련을 받는 자들에게는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즉 내면적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혁이 일어난 자들에게 온유의 가르침이 흘러나오게 되면, 그 체질이 온유함이 됩니다. 이때 그의 이름은 온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육체가 아니라 온유라 불리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면적 개혁을 통해 현실에서 구원이 일어나게 되면 그의 이름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구원이라는 영적 이름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에는 구원의 속성이 편만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경배이며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경건의 훈련을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옛것을 고수하고 싶은 보수적 속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새것을 받아들일 때에도 옛것을 고수하려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서 복음 받으려는 할례파라는 기이한 네피림과 같은 무리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옛것을 과감히 버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옛 것은 내가 아니며, 나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와 나의 현실은 어떤 것일까요?

 

2. 우리도 전에는 정욕, 악독 등과 같은 육적 속성을 가진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중생의 씻음은 영이 태어남으로 우리의 육적 속성을 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신 데에는 우리를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이 일어나면 그는 이미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의 씻음의 단계에 머물러 있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삶속에서 상속자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고 내면의 개혁이 일어나서 나의 육체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상속자의 권세가 현실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서열이 있습니다. 서열을 가르는 것은 이름입니다. 예수님이 영의 세계에서 최고로 뛰어난 것은 천사보다 월등한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구원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사탄의 이름은 거짓, 탐욕, 살인, 실패, 좌절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을 그 이름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차이는 삶의 차이입니다. 그 이름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이 있으면서도 권세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이름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는 삶이기 때문에 권세는 이름과 삶이 일치될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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