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3-2. 바울의 디도에 대한 목회 교훈(딛2:1-8)

관리자님 | 2019.02.20 13:59 | 조회 278

3. 바울의 디도에 대한 목회 교훈(2:1-8)

 

1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2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3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1. 디도는 영적 무질서가 팽배한 그레데 교회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디도에 대한 바울의 첫 번째 가르침은 바른 교훈의 합당한 것을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늘의 지식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지식은 세상의 빛으로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가르침입니다. 그레데 교회는 사실상 할례파들의 율법적 가르침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할례파들의 율법적 가르침은 세상 지식이며, 질서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도를 이용하여 만들어 낸 자신들만의 교리입니다. 이는 사실상 다른 복음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을 통해 다른 복음에 오염된 그레데 교회의 영적 무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영적 무질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로 세우라는 것일까요? 바울은 하늘의 지식을 교회의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에게 교훈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고 합니다. 늙은 남자에게는 절제, 경건, 신중의 덕을 가지게 하고, 믿음, 사랑, 인내에 있어서 온전하게 되라고 합니다. 이는 경건의 훈련을 통해 나타나는 삶의 결과물들입니다. 하늘의 지식이 그들을 주장하였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런 성품이 나타나면 그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교회에서 늙은 남자들 즉 어느 정도 세상의 삶을 살았으면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이 나타나는 그릇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νηφαλιουϛ)”는 원어에서는 술 취하지 않는 것, “경건은 존경할만한 것, “신중“self control”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사랑, 인내에 온전하게 되라는 것은 그 자신이 믿음, 사랑, 인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육체가 아니라 믿음, 사랑, 인내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가르침을 받으면 육체가 이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에게도 베풀라고 합니다. 젊은 여자는 직접 교훈하지 말고, 늙은 여자로 하여금 교훈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 교회에 영적 질서가 잡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질서가 잡히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2.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의 성도들 즉 늙은 남자와 여자, 젊은 남자에게 권면하라고 하면서 권면할 자격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디도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영적인 성숙한 자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한 자의 모습은 자신이 스스로 선을 내는 자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선을 낼 수 있는 자는 그 속에 선한 것이 쌓여 있어야 선을 낼 수 있습니다. , 선한 일에 본이 되는 것은 그 쌓인 선에서 선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는 교회의 대적자들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한 행동의 결과물들은 율법주의 자들인 그 대적자들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대적자들은 하늘의 지식을 가진 디도라는 그 제자 자체보다 그의 선한 삶의 결과물들에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늘의 말로 대적자들과 직접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선한 삶의 결과물들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의 대적자들은 이런 선한 삶의 결과물들에 굴복할까요? 이는 그들이 더 이상 대적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적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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